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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s
현대의 기억 산업은 과대평가되어왔다. 잊을까 봐 적어두는 메모는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증적인 라틴어 메모란덤 memorandum에서 온다. 아무도 연필과 메모지를 사용하지 않는 현대에는 대신에 사진으로 모든 것을 기록하게 되었다. 때문에 스마트폰도 큰 용량이 선호되고 그것도 다 차면 이제는 다국적기업이 이름 모를 산속에 쌓아둔 서버 더미에 나의 기억을 차곡차곡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적어도 필름카메라를 사용할 시절에는 한 장, 한 장 남은 필름을 세어가며 신중하게 구도를 잡아 찍고 현상하여 인화를 기다려 앨범에 붙이는 작업이 이미 과거가 된 순간들을 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식(禮式)이었다. 이에 비해 찍으면서 이미 결과물을 직시하고 마음에 안들 경우 삭제하면 되는 셀카는 끔찍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자아완결적 이미지들로, 필름사진이 갖는 심리적, 시간적 거리에서 오는 매력들을 결코 누릴 수 없을 것이다.
황혜민이 엮어가는 풍경은 작가의 잊고 싶지 않은 강박과 동시에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최소한 그녀의 대형 작품들의 경우 보여주기 위해 잊지 않고자 한다기보다는 잊지 않고자 하는 집착이 더 우선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위한 시각적 메모들이 나름의 조형적 규칙과 규모를 통해 공공에게 제시되기까지 이른 것이고 이는 다국적기업의 서버에 쌓여가는 메모리 폐기물들에 비한다면 운이 좋은 풍경들인 것이다. 이런 작가의 메모들은 때로는 우리에게 각자의 기억 속 비에 젖은 우드데크나 지나쳐온 공사현장, 하천부지 등을 더듬어 떠올리게 할 만큼의 공감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결코 공유된 적은 없으나 같이 경험한 듯 느끼게 하는 환각지(幻覺肢)같은 이미지들이 군데군데 솟아올랐다가 아쉽게도 곧바로 사라진다. 그녀의 기억과 그림의 틈새에 우리가 깊숙이 빠지게 될 차기작들을 기대해 본다.
정신영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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